Chardonnay M
성체조배 본문
몸의 자세
성체조배는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과의 마주 바라봄이며 대화이므로 이것은 묵상기도와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묵상기도 때에 하는 몸과 마음의 자세를 성체 앞에서 취하면 됩니다.
첫째로 몸의 자세는 예수님을 다만 생각하는 자세가 아니라 예수님과 직접 마나서 대화하는 자세, 곧 함께 있으면서 서로 바라보며 만나는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우리의 육안으로 예수님을 뵙는 것이 아니고 신앙을 바탕으로 마음의 눈과 영혼의 눈으로 예수님과 만나서 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앞에 모시고 바라뵙는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이 때 눈을 감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성체조배는 우리의 마음으로 주님을 만나 뵙는 일이므로 다른 일체의 사물들을 마음에서 비우고 오직 예수님만 앞에 모시고 뵙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묵상이나 생각을 하는 자세는 예수님과 만나는 자세와는 다릅니다. 예수님과 맞대면하여 서로 마주보는 자세를 취하여야 합니다. 허리와 목을 꼿꼿이 펴고 얼굴을 들어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을 바라뵙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이 때 머리를 들지않고 앞으로 숙이는 것은 생각하는 자세가 되기 쉽고 육체적으로도 훨씬 더 피로한 자세입니다. 머리의 무게가 무거우므로 머리를 쳐들고 머리가 아래 중심부와 수직이 되도록 하면 힘이 반밖에 들지 않습니다. 이 때 눈을 감은 상태로 예수님을 정면으로 바라뵙는데, 마음으로 예수님이 앞에 계시다고 믿으면서 마음의 눈길을 예수님께 드립니다. 기도는 서로 사랑하는 사람과의 대화이므로 머리를 들고 예수님을 바라뵙는 것은 결코 겸손이 모자라거나 교만한 자세가 아닙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앞에 가까이 모시고 정면으로 바라뵙는 것은 오히려 정다운 마주 바라봄이며 만남의 자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가능한 한 가까이 일치된 자세를 취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사실은 예수님께서 멀리 계신 것이 아니라 내 영혼 안에 그리고 내 눈 앞에 가까이 계신 것입니다.
마음의 자세
이제 성체 앞에서 기도를 시작할 때 먼저 성호를 긋고 잠깐 동안 양심성찰을 한 후 고백의 기도를 합니다. 이 때 여럿이서 기도를 하더라도 예수님과 나와는 단둘이서 만나는 것이므로, 마치 내가 사막에서 혼자 예수님하고만 있는 것처럼 예수님을 짝으로 삼게됩니다. 분심이 들더라도 오성이나 기억은 미치광이처럼 놓아두고 의지만은 줄곧 예수님께로 향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의지만이 우리의 행동의 주인이고 여왕입니다. 비록 우리가 나약해서 오랫동안 주님과 눈을 마주칠 수 없다 하더라도 한순간 잠깐씩 주님을 만나는 노력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하느님 현존수업이라고 합니다.
... 베르나르도 성인은 기도하러 기도소에 들어 갈 때, 수도원의 여러 가지 일들을 "너는 여기에 머물러 있거라." 하면서 마음에서 떼어 버리고 오롯한 마음으로 주님만을 사랑하고 만나기 위해서 기도소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마음을 허술하게 먹으면서 분심이 들어오건 말건 공상이나 분심에 몸과 마음을 내맡긴다면 주님을 만나는 기도가 잘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가다듬고 안으로 거두어 들어기만 한다면 기도 안에서 마음으로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만남을 하느님 현존체험이라 하는데 이 만남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며 주님께서도 가장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성체조배나 묵상기도를 하기 싫은 것은 살아 있는 예수님과의 실질적인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인데, 기도 안에서 실제로 예수님을 매번 만나는 사람은 기도가 지루하지 않고 시간이 빨리 지나가며 힘과 기쁨이 솟아 오릅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빵이시고 생명의 물이신 예수님을 기도 안에서 실제로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동반자로 모시고 서로 바라보며 사랑을 나누는 것이 기도인데, 이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고 추리나 명상을 하는 것도 아니며 다만 주님을 바라뵙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이 약해서 오랫동안은 못한다 해도 잠깐 동안씩 주님을 앞에 모시고 나를 바라보신다고 믿으면서 예수님을 바라뵙는 일은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모든 것들에서 이탈하고 보화이신 주님만을 바라뵈올려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보화가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 (마태 6,21)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바라뵈면서 동시에 다른 것을 바라볼 수는 없습니다. 주님을 바라뵙기 위해서는 주님 아닌 다른 모든 것에서 눈을 떼어야 합니다.
세상것에서 마음을 떼어 주님을 모시고 살며 영혼 안에 그리고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만을 바라뵈올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관상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상생활이란 살아 계신 예수님을 오롯한 마음으로 모시고 바라뵈며 친교를 나누는 생활입니다.
루가복음 10장에 나오는 마리아의 역할이 관상자의 역할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따를 나무라시면서 "마르따야 마르따야, 너는 너무나 여러 가지 일에 분주하고 걱정이 많다. 그러나 필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가장 좋은 몫을 택했다."고 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시간을 낭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 눈길과 사랑을 드리는 사랑의 행위를 한 것입니다. 사실은 마르따보다 마리아가 일을 더 많이 한 것입니다. 마르따의 일은 이 지상에서 끝나고 마는 일이지만 마리아가 예수님을 바라뵙고 사랑하는 이 일은 천국에 가서도 계속될 하느님 사랑의 행위입니다.
기도와 사도직
성체조배와 묵상기도는 그 자체가 훌륭한 사도직입니다. "너희가 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요한 15,5)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예수님 곁에 가까이 있고 일치한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이상으로 예수님께서 손수 해 주시므로 더 많은 일을 하는 결과가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사랑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렇게 줄곧 예수님 곁에서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면 예수님을 닮게 되고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당신과 하나가 되고 우리의 기도와 희생으로 성덕에 나아가며 많은 죄인들이 회개하여 구원되는 것입니다. 많은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서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한데 관상자들은 하느님 곁에서 하느님과 함께 늘 생활하므로 하느님의 은총을 구하기가 쉽습니다. 마치 성모님처럼 관상자들도 천상 은총의 중개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 현존수업
주님과의 일치인 이러한 기도를 위해서 우리는 성체조배나 묵상기도를 할 때 지성을 가지고 추리를 하거나 생각을 하는 것보다 사랑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체조배 때에 어떤 책을 읽거나 묵상을 하는 것보다는 주님과 생생하게 만나는 하느님 현존수업에 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서 성체조배를 할 때 무엇을 많이 생각하려 하지 말고 또 무슨 묵상에다 시간을 많이 할애하는 것보다 곧장 주님을 만나는 현존수업에 마음을 쓰는 것이 더 좋습니다. 물론 묵상도 중요하지만 묵상은 아직 주님을 만나는 것은 아니고 주님을 만나기 위한 준비 단계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 귀중한 성체조배나 묵상기도 시간에 주님을 실제로 만나는 기도는 하지 않고 묵상만 한다면 마치 수박 속은 먹지 못하고 수박 겉만 핥는 결과가 됩니다.
... 이렇게 주님과 만나는 기도에 시간을 많이 쓰면 자연히 예수님과 가까워지고 사랑과 정이 깊어집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책이나 묵상을 통해서 하는 것보다 하느님을 더 잘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되는 비결입니다.
구송기도로 하는 성체조배와 묵상기도
성배조배 때 십자가의 길 기도나 묵주기도를 하는 것을 마치 잘못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묵상기도 시간에 그리고 성체조배 시간에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은 하느님과의 생생한 만남인데 주의 기도와 성모송이 자주 나오는 십자가의 길 기도와 묵주기도는 하느님과 성모님을 만나고 일치할 수 있는 아주 훌륭한 기도입니다.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구송기도라도 잘 드리기만 하면 그것이 곧 구송기도인 동시에 묵상기도가 된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주님의 기도나 성모송을 드릴 때 예수님과 성모님을 앞에 모시고 바라 뵈면서 참으로 대화가 되도록 드리지 않는 데 있는 것입니다. 구송기도를 예수님과 성모님과 대화가 되도록 잘 드리기만 하면 그것은 곧 하느님과의 우정의 나눔 그리고 성모님과의 우정의 나눔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드리면서 입술만 움직이고 생각은 다른 데 가 있다면 그런 기도는 올바른 기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기도를 드릴 때 주님을 가까이 모시고 서로 눈이 맞은 상태로 마음을 나누는 기도가 되었다면 이것은 훌륭한 묵상기도가 된 것입니다. 구송기도냐 묵상기도냐가 문제가 아니라 비록 구송기도라 할지라도 하느님과 만난 상태로 진실한 대화가 이루어지도록 잘 드린다면 그것은 구송기도인 동시에 묵상기도인 것입니다.
우리는 나약하기 때문에 오랫동안 주님을 앞에 모시고 줄곧 바라뵙는 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치 높은 산에 올라 갈 때 줄을 잡고 올라가듯이 이 십자가의 길이나 묵주기도로 하느님 현존수업을 하는 것은 아주 쉽고도 단순하고 좋은 방법입니다.
기도의 초기 단계에서는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드릴 때에 예수님과 성모님을 기도 안에서 만나는 데 주력해야 합니다. ... 이러한 친밀한 관계가 이루어지면 자연히 서로 만나는 것이 생소하지 않으며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어 서로 잘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이가 되면 기도를 하는 것은 무미건조하고 딱딱하고 힘든 기도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인격적인 만남의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드릴 때마다 예수님과 성모님을 실제로 만나게 되므로, 기도 생활이 몸에 배어 기도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으로 성체조배하는 방법
그럼 구체적으로 한 시간 동안의 성체조배 시간에 십자가의 길 기도나 묵주의 기도로 묵상기도가 되도록 성체조배하는 방법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 할 수도 있겠으나 이 방법으로 할 경우 매일 착실하게 그리고 시간의 낭비 없이 잘 할 수 있는데, 구체적으로 주의 기도와 성모송을 하면서 기도 시간을 쓰기 때문에 구름잡듯이 막연하게 하는 기도보다 더 확실하고도 안전하게 우리를 기도에로 이끌어줍니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주의 기도나 성모송을 가지고 하는 묵상기도가 너무 단순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체조배나 묵상기도 때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으로 예수님과 성모님을 만나면 아주 조금씩이지만 매일 반복하는 가운데 예수님과 성모님과의 만남의 횟수가 축적되어 나아가므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과 성모님을 마음 안에 가까이 모시게 되고 친밀한 사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목표로 하는 것은 어떤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예수님과 성모님을 자주 만남으로써 예수님과 성모님 안으로 들어가 동화되고 일치되는 것입니다. 이 때 십자가의 길 기도나 묵주기도는 예수님과 성모님을 만나기 위한 하나의 수단과 방법이고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과 성모님을 만나는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람들 끼리도 서로 자주 만나고 대화와 우정을 나누면 서로 사랑과 우정이 깊어지듯이, 예수님과 성모님께 자주 눈길을 드리며 만나면 예수님과 성모님께 가까이 모시게 되고 친밀한 일치에 도달하게 됩니다. 기도를 할 때 무엇을 많이 생각하고 추리나 묵상이나 명상을 하는 것이 아주 대단한 일처럼 여겨질지 모르나 사실은 그런 것은 그리고 대단할 것은 없고, 단순한 기도로써 예수님과 성모님을 만나며 사랑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기도할 때 예수님과 성모님을 실제로 신앙과 마음으로 만났으면 그것은 이미 목표에 도달한 것이며, 생각이나 묵상이나 추리나 명상으로 그 시간을 다 보냈다면 겉으로는 잎이 무성하고 훌륭해 보이지만 아직 열매는 없고 목표에 도달하지도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체조배 때 시간을 낭비함이 없이 예수님을 만나는 현존수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효과적입니다.
이제 약식 십자가의 길 기도로써 성체조배와 묵상기도를 하는 방법을 설명해 보겠습니다. 우선 주님의 기도를 드릴 때 허겁지겁 아직 예수님과 눈이 마주치지 않은 상태로 드리기보다는 먼저 예수님을 앞에 현존시키고 예수님과 서로 눈이 마주치고 마음이 통했으면 주님의 기도를 드리기 시작합니다. 곧, 예수님 현존 앞에서 서로 바로보면서 드리는 것입니다. 이 때 서로 바라보고 서로 아는 것이 우정의 나눔인 묵상기도인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할 때 하늘은 멀리 있는 하늘이 아니라 가까이 우리 마음 속 곧 영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 하면서 우리 영혼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인성을 바라봅니다. 왜 예수님의 인성을 바라보아야 하는가 하면 하느님은 순수 영이신데 천사나 영이 아닌 우리가 하느님을 직접 바라뵐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성을 취하신 예수님을 바라뵙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성은 구체적인 사람이 되신 몸이므로 우리가 성모님이나 성인 성녀들을 상상할 수 있듯이 그렇게 예수님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는 것입니다. 곧 성부의 얼굴은 상상할 수 없으나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취하신 예수님은 우리 각자 나름대로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고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을 신앙의 눈으로 바라뵈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때 어떤 화면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모습, 곧 환시와 같은 만남이 아닌 신앙의 눈으로 어슴프레하게나마 지금 내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내 앞에 가까이 계시면서 나를 진실한 눈으로 사랑스럽게 바로보신다고 믿었으면 예수님을 기도 안에서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났으면 아버지를 만난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예수님을 보았으면 아버지를 본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인성을 기도 안에서 바라뵙는 것은 옳은 일이고 기도가 막연하거나 추상적이 아닌 구체적인 만남의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만난다고 함은 예수님이 내 앞에 계시고 나를 바라보신다고 믿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지 않는데 내 생각으로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나를 바라보신다고 상상했으면 그것은 헛된 만남이겠지만 실제로 내 안에 계시고, 예수님께서 나에게 눈길을 주시므로 나도 예수님께 눈길을 드리며 만났다면 이것은 참된 만남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기도 안에서 우리가 만난 예수님은 천국에 가서 맞대면하고 만나뵐 바로 그 예수님이십니다. 이 세상에서는 기도 안에서 신앙으로 희미하게밖에 바라뵈올 수 없지만 천국에 가서는, 영광의 빛을 받아, 있는 그대로의 예수님을 환히 바라뵙게 될 것입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예수님과 성모님 앞에 실제로 있는 몸과 마음의 자세를 취해야 할 것입니다.
약식 십자가의 길 기도와 묵주기도로 성체조배하는 방법
14처를 돌지 않고 성체조배실에 앉아서 마음으로 14처를 돌며, 먼저 주님의 기도를 드린다음, '제1처 예수님께서 사형선고 받으심을 묵상합시다.' 하고 사형선고 받으시는 장면을 떠올린 다음 묵상은 생략하고 현재 이 수난의 장면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믿으면서 예수님과 생생하게 눈을 마주칩니다. '예수 그리스도님, 주님을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주님의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하면서 예수님께 인사를 드립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기도서의 기도문은 생략하고 예수님과 서로 눈이 마주친 상태로 주님의 기도를 드립니다. 매번 주님의 기도를 드릴 때마다 저 멀리 있는 하늘이 아니라 영혼의 작은 하늘인 내 안을 바라보고 '우리 아버지'하면서 예수님의 인성을 바라봅니다. 성모송을 드릴 때는 아름다우신 성모님께서 사랑스립게 나를 바라보신다고 믿으면서 성모님을 내 앞에 가까이 모시고 서로 마음의 통하고 일치된 상태로 성모송을 드립니다. 결국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통해서 예수님과 성모님을 만난 일치의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삼위일체 하느님을 마음으로 바라보며 영광송을 드리고 '어머님께 청하오니 제 마음 속에 주님의 상처 깊이 새겨 주소서.' 하며 마음속으로 제2처로 갑니다. '제2처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심을 묵상합시다.' 에서 위와 같은 요령으로 그 장면을 마음속에 떠올린 후 예수님께 인사를 드리고 기도문은 생략하고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으로 예수님과 성모님을 만나는데, 이때 예수님의 옆모습이나 뒷모습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오시는 예수님의 눈과 마주친 상태로 주님의 기도를 드립니다. 이 때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장면이 마음에서 떠났다 하더라도 예수님과 성모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이 더 중요하므로 그 장면은 떠오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 퍼온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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