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rdonnay M
이해인 수녀 본문
깨알보다도 작은 씨앗이 바람에 날린다. 척박한 틈새를 비집고 내려앉아 연둣빛 새싹을 내밀더니 어느새 몽우리 끝에 꽃을 피우고 나섰다. 이해인 수녀도 그랬다. 꽃씨 같은 글을 띄워 우리의 메마른 가슴 어딘가에 희망의 꽃을 피웠다. 만개(滿開)한 꽃만이 꽃씨를 털어낼 수 있는 법. 하루하루 풍성한 꽃을 피운 그녀가 또 한 번 바람에 꽃씨를 띄웠다. 5년 만에 펴낸 이해인 수녀의 산문집 ‘꽃이 지고 나면 잎이 보이듯이’를 소개한다.
꽃이 지고 나면 잎이 보이듯이
이해인 수녀만큼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이도 드물 것이다. 2008년 여름부터 투병 생활을 시작했지만 그녀는 ‘명랑 투병’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 내며 밝고 아름다운 삶의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최근 출간한 산문집 ‘꽃이 지고 나면 잎이 보이듯이’(샘터 발행)는 암 투병과 동시에 사랑하는 지인들의 죽음을 견뎌냈던 시간들을 적고 있다.
글자 하나하나에 지난날을 돌아보고 현재의 삶을 긍정하는 그의 깨달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꽃이 지고 나서야 잎이 눈에 들어오듯 고통의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일상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이 보인다는 이치를 그녀는 섬세하게, 때론 명랑하게 때론 무척이나 담담하게 풀어놓고 있다. 여기에 세계적인 판화가 황규백의 그림을 곁들였다. 그의 그림은 정겨운 돌담, 작은 새 등 정감을 일깨우는 소재를 활용해 이해인 수녀의 글을 한층 더 깊이 있게 만든다.
꽃이 지고 나면
비로소 잎사귀가 보인다
잎 가장자리 모양도
잎맥의 모양도
꽃보다 아름다운
시가 되어 살아온다
둥글게 길쭉하게
뾰족하게 넓적하게
내가 사귄 사람들의
서로 다른 얼굴이
나무 위에서 웃고 있다
마주나기잎 어긋나기잎
돌려나기잎 무리지어나기잎
내가 사랑한 사람들의
서로 다른 운명이
삶의 나무 위에 무성하다
이해인 ‘잎사귀 명상’
새롭게 감사하는 마음은 곧 보석을 발견하는 일과도 같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다가가본 사람은 안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며, 작고 소박한 일상의 길 위에서 발견하는 감사가 또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를.
‘아침에 눈을 뜨면 아직 내 심장이 뛰고 있고 숨을 쉬는 것에 대하여 새롭게 감사하고 기뻐합니다. 기도 시간에 기억할 사람이 많은 것도 새롭게 기뻐하고, 식탁에서는 소박한 상차림이지만 하루 세끼 굶지 않고 먹을 수 있는 은혜에 새롭게 기뻐합니다. 좋은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고 산책도 할 수 있는 휴일의 시간을 늘 처음인 듯 설레며 기뻐합니다’
이해인 수녀는 마음의 눈을 크게 뜨고 보니 주변에 보물 아닌 것이 없는 듯하다며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이미 놓쳐버린 보물도 많지만, 다시 찾은 보물도 많다고 고백했다. 그녀에겐 삶에 새롭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일이 보물을 발견하는 일과도 같았다.
의연한 자세로 병마와 싸우는 그녀지만 새벽에 문득 입에서 쓴맛을 느끼며 한 모금의 달콤한 주스를 그리워하고, 어느 순간엔 곁에 있는 종이 한 장도 집기 싫은 무력증에 빠지고, 의사나 환자의 한마디에 필요 이상으로 민감해지고, 예측불허인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의기소침해지기도 한다. 그때마다 그녀는 암 환자의 고통은 설명이 불가능한 것이라는 말을 실감하곤 한다. 그러나 아프면 아픈대로 나눌 것이 많다는 게 그녀의 결론이다. ‘제가 암과 잘 지내는 모습을 보여주면 암 환자에 희망을 줄 수가 있잖아요. 역설적 고백이지만, 암 고통이 축복이에요. 제가 아픈 후에 행복과 기쁨이라는 말을 더 많이 쓰게 되더라고요’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책을 통해 이해인 수녀는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전하기도 했다. 어머니의 빈소에서, 장례미사에서 모질게 맘을 먹고 눈물을 삼킨 이해인 수녀는 기도를 하다가 밥을 먹다가 책을 읽다가 빨래를 하다가 산책하다가 감당하기 힘든 슬픔에 자꾸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어머니는 딸의 상본이나 메모, 신문에 난 기사들을 오려서 파일을 만들어놓기도 했고, 성당 노인대학에서 특별한 날에 나눠 주는 타월이나 내의를 열심히 모아두었다가 일 년에 두 번 수녀 딸들에게 건네주기도 했다. 고운 헝겊으로 묵주 주머니나 털바지를 직접 떠서 소포로 보내주곤 했던 어머니는 과묵했지만 감탄사의 여왕이기도 했다.
꽃무늬 여름 이불을 선물해드렸을 때 원 세상에 이렇게 예쁜 이불도 다 있냐며 잠이 저절로 올 것 같다고 기뻐하시던 모습, 50여 년 만에 만난 딸의 소꿉동무와 전화를 연결해드렸을 때 ‘정말 반갑네, 하도 오랜만이라 마치 죽음에서 부활한 사람을 만난 느낌이 다 드는구나. 우리 한 번 만나야지’라며 유난히 반가워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했다.
모전여전(母傳女傳)이었을까, 이해인 수녀가 한창 재롱을 부리던 아기일 적엔 ‘좋다, 좋다’ 손뼉을 치며 즐거워해서 집에 오는 손님들이 ‘넌 만날 무에 그리 좋으냐’며 그 아기를 서로 안아주려고 했다고 한다. 절제와 극기를 미덕으로 삼는 수도자의 신분으로 의식적으로 감탄사를 아끼며 살아온 날들을 떠올리며 그녀는 ‘어린 시절의 그 밝고 긍정적인 감탄사를 다시 찾아 나의 남은 날들을 더 행복하게 가꾸어가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한숨을 웃음으로, 거친 말을 고운 말로, 불평을 감사로, 무감동을 놀라움으로 바꾸어 날마다 희망의 감탄사가 끊이지 않는 ‘좋다’ 수녀가 될 요량으로.
많은 추억은 많이 울게 하네요
‘꽃이 지고 나면 잎이 보이듯이’는 전체 여섯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맨 마지막 장 ‘그리움은 꽃이 되어_추모일기’에는 금아 피천득 선생, 김수환 추기경, 박완서 작가, 김점선 화가, 장영희 교수, 법정 스님 등 한 시대를 온몸으로 살다간 우리 시대의 어른들과 이해인 수녀가 맺은 우정, 그리움, 애틋함을 새긴 추모의 글들이 담겨 있다. 그녀는 ‘모두 다 저세상으로 떠난 슬픔 속에 추모시 쓰느라 바빴던 한 해였다’고 지난날을 회상했다.
특히 산문집 첫 장에 서문 대신 故 박완서 작가의 편지가 실려 있어 눈길을 끌었는데 이 책을 위해 글을 써주겠다는 약속을 뒤로하고 멀리 ‘못 가본 길’을 떠난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 애절하게 녹아 있었다. 오래전 박완서 작가가 남편과 사별한 지 세 달 만에 외아들을 잃었을 때, 그래서 절망과 슬픔으로 지옥 같은 하루하루를 버텨야 했을 때 이해인 수녀가 그녀의 곁에 머물렀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나이와 세월을 초월한 애틋한 우정을 나눴다.
‘문학은 삶에 대한 감사함이라고 일러주신 선생님, 꿈에서라도 다시 뵙고 싶은 그리운 선생님, 선생님을 보내 드리는 고별식에 참석하고 하관 예절까지 다 지켜보고 왔는데도 이 세상에 안 계시다는 것이 실감되질 않네요. 제 방에 수북이 쌓아둔 각종 일간지에 선생님의 웃는 얼굴이 실린 기사를 보면서도 ‘이분이 왜 여기 계실까?’ 의아합니다. 추억이 많은 그만큼 눈물도 그치지가 않습니다’
사랑하는 이해인 수녀님
그리던 고향에 다녀가는 것처럼 마음의 평화를 얻어 가지고 돌아갑니다.
내년 이맘때도 이곳 식구들과 자장면을 (그때는 따뜻한) 같이 먹을 수 있기를,
눈에 밟히던 꽃과 나무들이 다 그 자리에 있어
다시 눈 맞출 수 있기를 기도하며 살겠습니다.
당신은 고향의 당산나무입니다.
내 생전에 당산나무가 시드는 꼴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꼭 당신의 배웅을 받으며 이 세상을 떠나고 싶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나보다는 오래 살아주십시오.
주여, 제 욕심을 불쌍히 여기소서.
2010. 4. 16. 박완서
가톨릭에 몸담은 수녀인 만큼 신부님들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도 빠질 수 없다.
김수환 추기경님이 언젠가 저더러 항암치료 받느냐고 물으셔서 그렇다고 하니 연민의 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래? 대단하다 수녀!’ 하시는데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힘든 치료를 받는 이들에게 종종 ‘대단하세요, 정말!’ 하며 추기경님의 그 표현을 흉내 내보기도 합니다.
불러도 대답 없으신 이태석 신부님, 아아 우리 신부님 ! 수단의 가난한 이들을 위해, 톤즈의 해맑은 청소년들을 위해 현지인과 똑같이 적응하려 애쓰며 부서지고 부서진 그 사랑은 이제 더욱 빛나는 슬픔이 되어 모든 이를 하나로 모이게 하네요. 자신만을 위하여 안일하고 이기적으로 사는 삶은 더 이상 바람직한 삶이 아니라고 침묵으로 강하게 소리치고 계시네요.
이해인 수녀는 종교를 초월해 정신적 교감을 나눈 법정 스님과 멋진 그림엽서를 받아 들고 ‘아유 곱다, 어디서 이런 걸 구했지’ 하고 감탄했을 금아 피천득 선생을 그리며 애틋한 추모를 이어갔다.
책의 마지막에는 이해인 수녀가 투병의 고통 속에도 놓지 않은 삶에 대한 기쁨과 감사 그리고 모든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따뜻한 연민이 담긴 시 ‘여정’을 수록해 뭉클한 가슴으로 책장을 덮게 한다.
태어나면서부터
나는 순례자
강원도의 높은 산과
낮은 호숫가 사이에 태어났으니
나의 여정은 하루하루
산을 오르는 것과 같았고
물 위를 걷는 것과 같았네
지금은
내 몸이 많이 아파
삶이 더욱 무거워졌지만
내 마음은
산으로 가는 바람처럼
호수 위를 나르는 흰 새처럼
가볍기만 하네
세상 여정 마치기 전
꼭 한 번 말하리라
길 위에서 만났던 모든 이에게
가만히 손 흔들며 말하리라
많이 울어야 할 순간들도
사랑으로 받아 안아
행복했다고
고마웠다고
아름다웠다고…
이해인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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